미국 역사와 지리 - 1장 아메리카 원주민 및 외지인들
아메리칸 인디언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도래 이전까지 최소 수천 년 간 타 대륙과 접촉없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일부 문명을 제외하면 많은 인구가 소단위 부족을 중심으로 원시적인 수렵-채집 생활을 지속해왔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농작물을 재배하는데 능숙했다.
옥수수를 비롯한 채소와 과일 그리고 땅콩, 코코아, 담배도 재배했다.
그들은 수로와 댐을 만들어 물을 공급하고, 도자기를 굽고 바구니를 짜고 솜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북미 대륙에서는 지역의 특성에 따라 물소를 주식으로 하여 이동하는 부족이나 평지에서 정착생활을 하는 부족 등이 발전하여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중미와 남미 북·서쪽 지역에서는 농경 사회가 구성되기도 했으며 그 중 일부는 고대 문명으로 발전하여 미지의 불가사의로 알려져 있는 마야, 잉카, 아스텍 문명을 이루었다.
영국에서 온 이주민들
1600년대 초부터 영국 등에서 많은 식민지 개척민들이 북 아메리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런던회사가 이주민들을 버지니아로 보낼 무렵인 1607년에 플리머스 회사도 이주민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뉴잉글랜드 지방의 메인에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영국으로 귀환했다.
잠잠했던 뉴잉글랜드로의 이주가 떠오르게 된것은 필그림교도 의해서이다.
영국국교회에 맞서 네덜란드로의 이주해 살던 필그림교도들에게 뉴잉글랜드의 지도가 그들 손에 들어간 후 , 아메리카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필그림교도들은 영국 버지니아 회사의 도움으로 1620년 9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항을 출발했고 11월에 가까스로 뉴잉글랜드 지방에 도착했다.
그들은 사회적 억압을 피해 새로운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기회와 자유를 찾아 더 살기 좋은 나라를 꿈꾸며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그곳의 이름을 출발지의 이름을 따라 플리머스라 짓고 배에서 회의를 열고, 법률과 공직을 제정하여 따르겠다는 '메이플라워서약'을 합의 했다.
이 서약은 초보적인것이기는 했지만 아메리카 최초의 자치 헌법이었다.
플리머스는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사람들이 정착한 곳으로 현재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스 카운티이다.
미국의 노예 제도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
17세기와 18세기에 남자, 여자, 어린이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강제로 끌려왔다.
그들은 문화도 말도 가족도 마을 공동체도 다 잃은채 먼 이국 땅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노예들은 주로 아프리카의 4개 지역에서 잡혀 왔다.
세네감비아 : 세네갈 잠비아 기니비사우, 말리
골드 코스트 : 가나, 코트디부아르
비아프라만 : 나이지리아 동부, 케메룬
중서 아프리카 : 앙골라 콩고 공화국, 콩고 민주공화국, 가봉
미국의 노예제도
미국의 첫 아프리카인 노예들은 1619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도착했다.
흑인 노예 20명이 거래된 이후에 노예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다.
당시 담배 농사를 주로 지어 생업을 이어가던 영국의 이민자들은 흑인 노예에게 담배, 쌀, 쪽등 수익성이 좋은 작물 농사일을 시켰다.
1641년, 노예제도가 합법화되고, 아프리카인들은 개인의 소유물이자 가치 있는 상품으로 취급당했다.
그들은 법적 권리라곤 전혀 없이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다.
성인남자와 여자 노예는 노동 상품으로 매매되었다.
그중 피부색이 옅은 젊은 여성은 첩이나 매춘부로 팔리기도 했다.
1779년에는 무려 20만 명의 흑인 노예가 미국으로 팔려 오기도 했다.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담배가 과잉생산되자 점차 면화재배가 늘어났다. 그런데 기존의 조면기로는 미국 내륙지역에서 재배되는 단모품종의 씨앗제거가 불가능하여 주로 동남부 해안지역에서 잘 자라는 장모품종을 재배하였다.
산업혁명으로 영국에서 면화 수요가 폭증했지만 생산량이 적은 관계로 수출보다는 내수용 정도만 충당할 수 밖에 없었다.
1793년, 새로운 조면기가 일라이휘트니에 의해 개발되면서 달라졌다. 면화 재배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수출도 이루어지면서 흑인 노예에 대한 수요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미국 남부지방의 노예 수는 1790년에 약 70만 명이었지만, 19세기 전반기에 남부 지역이 면화왕국으로 변하면서 흑인노예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1850년에는 320만 명을 기록했다. 노예 가격도 뛰었고흑인 노예에 대해 북부보다 더 동정적이던 남부인들의 생각도 변하여 노예제도 폐지론은 자취를 감추었다.수탈과 인권 말살, 지독한 인종 차별이 발생하였고 노예제가 남부지역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세기 초에 대서양 노예 무역은 종식되었으나, 미국 남부에는 노예제가 핵심적인 경제 제도로 존속하였다. 19세기 초반에 북부는 노예 해방 법령을 통과시켜 점진적으로 적용하였다.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하였고 남부는 농업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미국은 독립초기부터 무역관세와 경제 등 많은 면에서 북부와 남부가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링컨은 노예제도를 증오했고 하루 빨리 사라지기를 바랬다.
그러나 노예문제로 인해 미국이 분열되고, 한 국가의 기틀이 파괴되는 것은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주에서는 노예제도를 허용하지 않고, 이미 노예제도를 수용하고 있는 주는 얼마간 그 상태로 두자는 입장을 취했다.
1860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남부는 노예제도의 유지를 주장했고, 북부는 더글라스의 주장에 의해 주민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북부 민주당과 남부 민주당은 각기 다른 후보를 내세웠고, 이번 선거에서는 노예문제와 관계없이 미국의 분열을 방지할 것을 주장하는 입헌통일당이라는 정당도 생겼다. 선거 결과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에 반발한 남부의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였고 다음해 4월에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링컨 대통령은 앤티텀 전투에서 승리 5일 후인 9월 22일의 각료회의에서 노예해방 선언을 발표하여 1863년 1월1일부로남부연합 내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북부의 승리로 종전된후 1865년 미국수정헌법 제13조 에서 전국의 노예 제도를 금지하였다.
해방 노예의 선택
1860년 남부에는 4백만명의 흑인이 있었다. 25만명은 자유 신분이었고, 19만명 정도는 연방군에 복무 했으며, 30만 정도가 북부가 점령한 여러 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남부 지역의 농장에서 살아온 3백만명 정도의 흑인은 해방과 동시에 자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야만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의회는 임시해결책으로 흑인에게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시민권 법안을 제장하고, 해방노예관리국을 존속시키기로 했다.
해방노예관리국은 1865년 3월 1일, 1년 기한으로 발족한 관청으로서 군인과 문관들이 흑인의 구호 문제와 취업 알선, 교육과 재판 그리고 반역자로 부터 몰수한 재산의 운용등에 관한 일을 맡았다.
노예 해방 이후 농장주들은 농장을 어떤 방법으로 경작해야 할지 몰랐고, 해방된 노예들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랐다.
이때 가장 일반적으로 시행된 방법은 대농장을 소규모로 흑인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경작하게 하고 필요한 물건은 미리 빌려 주는 방법을 택했다.
농장주들은 흑인 소작인에게 집, 농기구, 비료, 종자 따위를 먼저 빌려주고 그 대가로 수확의 3분의 2를 받아갔다.
그로 인해 노동계약에 관해 백인 고용주와 흑인 노동자 사이에 법적인 고용관계의 명문화가 필요하다 생각이 들어 노동계약을 하게 되었으나 ,이때 상당수의 흑인들은 계약을 부자유한 것이라고 생각 해서 계약 자체를 꺼렸지만 ' 소작인 제도'에 의한 농장 경영 체제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