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로 온 식민지 정착민의 대부분은 계약하인의 신분이며, 계약한 노동 시간을 마치고 자유민이 될 기대에 부푼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계약은 종료 시 법에 따라 50에이커 상당의 토지 소유권을 청구할 수 있고, 담배 농사로도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지는 담배 수요는 토지 사재기를 부채질 했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정착민은 좋은 땅을 모두 사들이기 시작해습니다.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 계급들은 의회를 장악 후 본인의 이익을 지키기에 유리한 법을 개정 후 통과 시켰습니다.
예를 들자면, 의회는 하인이 될 백인에 대해 계약에 의한 예속기간을 연장했습니다.
하지만, 흑인 하인은 재산으로 취급을 받았고, 노예가 아니었으나 노예와 다름 없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두가지 측면에서 엘리트 계급에 유리했습니다.
하인의 계약기간을 늘려서, 공급되는 노동량은 늘리고, 자유민과의 땅 경쟁은 줄기 때문입니다.
백인 자유민과 계약하인은 땅을 소유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아메리카에 속아서 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 이들의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흑인과 백인을 막론하고 계약하인과 노예와 땅 없는 자유민이 모여 불만에 가득 찬 하층 계급이 생겼교, 분노로 들썩거리는 그들의 심정은, 땅이 있다 해도 강과 도로와 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까지 밀려난 가난한 자유민의 심정과도 통했습니다.
하층 계급의 불만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사회 질서를 혼란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그로인해, 1660년대 아이작 프렌드라는 계약하인이 다른 계약하인 40여명을 규합해 무기를 손에 넣고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여 자유를 찾으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당국이 이 계획을 알아채 결군 반란은 시작도 전에 산산이 부서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엘리트 계급인들은 땅 없는 무리들을 몹시 두려워하여 1670년 버지니아의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쥐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회가 땅을 소유한 사람만이 투표할 수 있도록 법을 통과시켜, 그들의 투표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지만, 총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는 식민지법에서는 만약의 공격에 맞서 식민지를 방어할 용도로 모든 백인이 총기를 소지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빚에 쪼들려서 폭발 직전 상황에 이른 이들의 무장을 버지니아 주지사인 윌리엄 버클리는 두려워 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 흑인 매매하는 노예주이자 인권변호사 (0) | 2023.04.04 |
---|---|
노예제를 선택하다 (0) | 2023.03.25 |
초기 아메리카 노동 계약 (0) | 2023.03.23 |
미국 역사와 지리 26장 - 미 금본위 제도 (0) | 2023.03.22 |
미국 역사와 지리 25장 - 덤버턴오크스 회의 (0) | 2023.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