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시대의 배신자 미국의 이완용 베네딕트 아널드(Benedict Arnold)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던 아널드는 영국의 과도한 세금으로 생계가 위협받자 자유의 아들들 분회에 가입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사재를 털어 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고, 영국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를 눈여겨본 워싱턴이 아널드를 퀘벡 정벌군 사령관에 임명했고, 그는 1천 1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 겨울에 550킬로미터에 달하는 메인주의 동토를 횡단해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를 통해 아널드는 '아메리카의 하니발'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는 카르타고의 장군 하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한 사건에 빗댄 표현이었습니다.
아널드는 1777년 뉴욕 주 사라토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심한 총상을 입으면서도 대륙군에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퀘백에서 총상입은 다리에 다시 총을 맞았지만 다행히도 절단은 면했어도,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공에도 대륙회의와 군부에서 보상이 따르지 않자 독립전쟁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공적들로 부터 독직죄로 고발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독직죄는 공무원이 지위나 직무를 남용하여 저지르는 죄)
여러 사건들로 불만을 품은 아널드는 비밀리에 영국군과 내통하기 시작하였고, 1780년 7월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 요새의 사령관이었던 아널드는 2만 파운드를 받고, 이 요새를 넘긴다는 밀지를 영국군 소령을 통해 영국군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전령이 체포되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자 영국진영으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영국군 준장이 되어 버지니아와 고향인 코네티컷에 쳐들어가기도 했으며, 전쟁 이후에는 캐나다, 영국, 서인도제도에서 사업을 하고, 1801년 런던에서 사망하였습니다.
현재까지 아널드는 미국 최대의 배신자로 각인되었으며, 티 파티(tea party) 와 같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이 베네딕트 아널드 상을 만들어 그들과 반대되는 성향을 나타내는 정치인을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Tea party의 Tea는 taxed enough already 세금 이미 충분히 뜯겼다의 약자이며, 이는 보스턴 차 사건을 빗대어 만든 이름입니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운 덕에 이완용은 1880년대 후반 미국에서 고위급 외교관으로 근무를 하였습니다.
1888년 대리공사로 승진하고 1890년에 귀국할 때만해도 친미파였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에는 미국 외교관 알렌의 주선으로 미국공사관에 피신을 했고, 아관파천 때는 친러파가 되고, 일본이 주도권을 잡고 나서는 친일파로 전향하였습니다.
시대와 상황이 베네딕트 아널드와 이완용을 변하게 하였지만, 민족의 반역자로 영원히 남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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